쿤달리니와 영적 힘의 위험에 대한 크리슈나무르티의 견해
쿤달리니 에너지와 명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영적인 힘의 위험성에 대해 경고합니다. 이 글은 초감각적 지각이나 치유 능력과 같은 시디가 깊은 명상 수행에서 나타날 수 있지만, 개인의 이기심이나 부도덕한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강조합니다. 진정한 선의와 도덕적 청렴함이 없이 쿤달리니 에너지를 추구하거나 영적인 능력을 개발하는 것은 자기 파괴적이고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궁극적으로, 이러한 특별한 힘은 진실 자체와는 별개이며 제한적인 반면, 진실은 보편적이고 전체적이라고 설명합니다.
명상, 쿤달리니, 그리고 영적 능력의 위험성
“명상을 넘어서: 쿤달리니와 영적 능력의 위험성에 대한 크리슈나무르티의 견해”라는 자료를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이 자료는 명상, 초감각적 지각, 쿤달리니 에너지, 그리고 영적 능력의 위험성에 대한 심오한 통찰을 제공합니다.
주요 주제 및 핵심 내용:
1. 명상과 초자연적 능력 (Siddhis):
- 명상과 능력 발현의 연관성: 자료는 명상을 “이론이 아닌 매일의 실천”으로 깊이 탐구할 때, “초감각적 지각, 치유, 염력 현상과 같은 능력들”이 발현될 수 있다고 언급합니다. 이러한 능력들은 티베트와 힌두 전통에서 “시디(sidis)”라고 불립니다.
- 증거 및 개인적 경험: 듀크 대학교의 실험이 언급되며, 화자는 “개인적으로 공중부양과 같은 현상을 목격했다”고 밝힙니다. 이는 이러한 능력이 단순한 이론이 아님을 시사합니다.
2. 쿤달리니 에너지의 본질과 위험성:
- 쿤달리니의 정의: 쿤달리니는 “조심스러운 가르침, 엄격한 수행, 그리고 훈련된 통제를 통해 깨어나는 에너지”로 묘사됩니다. 이 에너지는 “몸의 다양한 상태를 통과”하며, “단순한 의지나 집중으로는 활성화될 수 없다”고 합니다.
- 도덕적 순결의 중요성: 쿤달리니 활성화의 가장 중요한 전제 조건은 “절대적으로 의로운 행동”입니다. “착하고, 남을 해치지 않고, 결코 화내지 않고, 자신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 “만약 에너지가 이기적이거나 부도덕한 상태에서 방출된다면, 그것은 자멸하고 세상을 해칠 것이다.”
- 성적인 충동, 탐욕, 폭력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이 내적 정화 없이 쿤달리니를 각성시키면 “성적인 괴물”, “동등하게 위험한 존재”가 될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 따라서, “진정으로 선함과 의로움에 뿌리내리기 전에는 이 에너지에 접근해서는 안 된다.”
- 수면의 역할: 깊은 수면 상태에서 “뇌세포 자체가 진정되고 그들 자신의 에너지를 생성”하며, 이 “수면의 에너지는 끊임없이 갱신되며 쿤달리니가 각성시키기로 되어 있는 에너지와 연결되어 있다”고 설명합니다.
- 상업화 및 부적절한 관행에 대한 경고: “오늘날 인도에서 사람들이 쿤달리니를 팔며 도덕적으로 준비되지 않은 개인에게 이 에너지를 방출하려고 한다”는 점이 비판됩니다. 일부 구루나 수행자들의 부적절한 각성 시도는 “분별력이나 고귀한 의도 없이 사용될 때 괴물 같은 힘이 된다”고 경고합니다.
- 쿤달리니의 물리적, 비물리적 측면: 쿤달리니는 신체의 여러 “중심”을 통해 이동하며, 이 중심들은 “태양 신경총과 같은 물리적인 것”이라고 설명됩니다. 이 에너지가 “정수리를 통과할 때” “더 이상 물리적이지 않은 완전히 다른 에너지”가 된다고 언급됩니다.
- 쿤달리니와 진리의 관계: 자료는 쿤달리니가 “진리의 에너지와 완전히 다르다”고 주장하며, 쿤달리니는 “현실의 에너지”이며 “생리적이고 심리적이므로 항상 제한적”이라고 강조합니다.
- “내 개인적인 느낌은 진리가 고려될 때 쿤달리니는 분명히 더 제한적인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진리와 같을 수는 없다.”
- 궁극적으로, “진리는 전 지구적이고 보편적”인 반면 쿤달리니는 “제한적”이며, “아무도 인도에서 시디라고 불리는 특별한 힘과 관련된 이 모든 것들을 다룰 필요가 없다”고 결론짓습니다.
3. 영적 능력 (Siddhis)의 위험성:
- 어린아이의 장난감으로 취급: “진정으로 종교적인 사람”은 이러한 능력을 “어린아이의 장난감으로 취급”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개인적인 이득이나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 사용될 수 있다.”
- 악용의 가능성: 치유 능력의 예를 들며, “정신적 균형이 없으면 이 능력은 다른 사람을 착취하는 수단이 된다”고 경고합니다.
- 자만심과 이기주의: 능력이나 재능을 가진 사람들의 가장 큰 위험은 “우월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특히 어린이나 젊은이들은 “자신이 특별하거나 선택받았다고 느끼며 모든 악이 발생한다.” 이들은 “반사회적, 개인주의적, 공격적이며 극도로 자기중심적”이 될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 “당신이 선해질수록 예지력과 같은 능력을 얻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들을 만지지 마라. 당신이 그것들을 가질 수도 있지만 등을 돌려라.”
- 능력 자체는 위험이 아님: 자료는 능력을 피할 수는 없지만, “그것들의 함의와 위험성을 인식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결론:
이 자료는 명상과 영적 능력의 잠재력을 인정하면서도, 그에 수반되는 도덕적, 심리적 위험성을 강력히 경고합니다. 특히 쿤달리니 에너지의 각성은 극도의 도덕적 순결과 내적 정화를 요구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 개인과 세상에 해를 끼칠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궁극적으로, 이러한 능력들은 진정한 영적 변형의 필수적인 부분이 아니며, 진리는 이러한 제한적인 현상들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고 보편적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능력을 추구하는 것보다 내면의 선함과 의로움을 함양하는 것이 훨씬 중요함을 역설합니다.
전문 번역: 쿤달리니와 명상
우리가 명상을 초감각적 지각, 치유, 정신력으로 물질을 다루는 현상 및 그와 같은 모든 현상들로부터 분리한다면 명상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요? 노스캐롤라이나의 듀크 대학교에서 이에 관한 실험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티베트와 힌두 전통에서는 명상을 더 깊이 들어갈 때 나타나는 시디(sidis)라고 불리는 능력들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일반적인 감각을 넘어선 힘들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공중부양 등의 현상을 목격한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개인적인 경험만이 아니었습니다. 명상을 이론이 아닌 일상적인 수행으로 깊이 탐구할 때, 이러한 능력들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능력들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극도로 조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들이 온갖 바람직하지 않은 활동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명상과 신성한 것에 깊이 몰입한 진정으로 종교적인 사람은 이러한 힘들을 조심 없이 다루는 어린이의 장난감처럼 여겨야 합니다. 이것들은 개인적 이익이나 이기적인 목적으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치유를 생각해보세요. 만약 누군가가 어린 시절부터 이 능력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기른다면, 원하지 않는 사람들을 끌어들일 위험이 있습니다.
그리고 정신적 균형 없이는, 이 능력이 다른 사람들을 착취하는 수단이 됩니다. 티베트인들과 힌두교도들은 오랫동안 아마도 이 지식이 고대에 인도에서 티베트로 전해졌다고 믿어왔으며, 조심스러운 가르침, 엄격한 수행, 그리고 훈련된 통제를 통해 깨어나는 쿤달리니라고 불리는 에너지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 에너지는 몸의 다양한 상태를 거쳐 지나가며 단순한 의지나 집중만으로는 활성화될 수 없습니다.
이 모든 것에 접근하기 전에 노력과 통제를 깊이 이해해야 합니다. 하지만 분명히 해둡시다. 이 에너지는 결코 공개적으로 논의되거나 자각 없이 사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관심이 있으시다면, 간단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핵심 아이디어는 모든 에너지가 이 쿤달리니 영역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해방시키려면, 절대적으로 올바른 행동을 해야 합니다.
선량해지고, 다른 사람을 해치지 않고, 절대 화내지 않고, 절대 자신만을 생각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기적이거나 부도덕한 상태에서 에너지가 해방된다면, 그것은 자멸하고 세상을 해칠 것입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에게 성적 충동이 있고 도덕적 통제 없이 이 에너지가 해방된다면, 그들은 성적 괴물이 될 것입니다.
누군가가 탐욕스럽거나 폭력적이고 내적 정화 없이 이 에너지를 깨운다면, 그들은 똑같이 위험해집니다. 따라서 진정으로 선량함과 의로움에 뿌리를 내리기 전까지는 이 에너지에 접근해서도 안 됩니다. 잠 자체도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몸을 쉬게 하는 것을 넘어서, 마음이 조용해지도록 합니다.
이러한 깊은 정신적 고요함의 상태에서, 뇌세포들 자체가 조용해지고 그들만의 에너지를 만들어냅니다. 이 잠의 에너지는 지속적으로 갱신되며 쿤달리니가 깨우려고 하는 에너지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진정으로 가장 진정한 마음의 선량함에 뿌리를 내리지 않는 한 이 에너지를 건드려서는 안 됩니다.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해치거나 거짓으로 고발하더라도, 당신은 내적 의로움에서 확고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이 에너지가 자연스럽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먼저 내적으로 자신을 연마하지 않고 의도적으로 그것을 쫓는다면, 문제에 빠질 것입니다. 오늘날 인도의 사람들이 쿤달리니를 팔면서 도덕적으로 준비되지 않은 개인들에게서 이 에너지를 해방시키려고 시도하고 있습니다. 인도의 일부 구루들이나 수행자들이 이 에너지를 부적절하게 깨우려고 시도합니다.
일부는 성공하지만 이러한 수행들은 종종 전통적인 힌두교 의식과 결합되어 있으며 분별력이나 고상한 의도 없이 사용될 때 괴물 같은 힘이 됩니다. 이런 이유로, 마치 장군들이 초능력을 가진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선량해질수록, 능력과 투시력 등을 얻게 될 것이라고 말해집니다.
그것들을 건드리지 마세요. 당신이 그것들을 가질 수도 있지만, 등을 돌리세요. 위험은 능력이나 재능을 가진 모든 사람들에게, 그들이 우월하다고 느낄 위험이 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먼저 그들은 자신이 지구의 희망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특히 어린이와 젊은 사람들이. 특별하거나 선택받았다는 이 느낌으로 모든 악이 일어납니다. 그들은 반사회적이고, 개인주의적이고, 공격적이며 극도로 자기중심적이 됩니다. 특별한 재능을 가진 모든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므로 재능과 능력은 위험한 것이 아닙니까? 재능이나 능력을 피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의 함의와 위험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힌두 전통에서는 뱀 또는 쿤달리니라고 불리는 것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쿤달리니 문제를 깊이 들여다본다면, 다른 사람들과 그것을 경험한 일부 사람들이 제게 말한 바에 따르면, 주요 아이디어는 그것이 몸의 다양한 중심들을 통한 에너지의 각성이나 해방의 한 형태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중심들은 휴면 상태에 있거나 완전히 작동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에너지가 그것들을 통해 움직일 때, 그것은 어느 정도의 문제, 고통, 혼란, 그리고 동요를 일으킵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우리가 말하는 변화에 필요하지 않습니다. 아니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에 따르면, 힌두 전통에서는 물리적이지 않은 에너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물리적 몸에서 깨어나고 다양한 중심들을 통과한다고 말해집니다. 하지만 그것을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문제에 매우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합니다. 이러한 중심들은 주요 중심인 태양신경총과 그 아래의 다른 중심들과 같이 물리적입니다. 가슴에 하나, 머리 뒤쪽에 하나, 심장 근처에 하나, 그리고 이마 중앙에 하나가 있습니다.
결국, 이 에너지가 머리의 정수리를 통과한다고 말해집니다. 그런 일이 일어날 때, 그들은 에너지가 완전히 달라져서, 더 이상 물리적이지 않다고 말합니다. 진리의 에너지는 현실의 에너지와 완전히 다릅니다. 쿤달리니는 진리의 에너지의 일부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그 에너지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현실의 에너지는 생리학적이면서 심리학적이며 따라서 항상 제한적입니다. 쿤달리니가 부차적인 문제라고 말하지 않겠습니까? 다시 말해서, 제 개인적인 느낌은 진리가 고려되면, 쿤달리니는 더 제한적인 무언가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확실히, 그것은 진리와 같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물리적이고 심리생리학적 에너지의 조합일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일부 젊거나 경험이 없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까요? 네, 확실히 그렇습니다. 하지만 진리는 전지구적이고 보편적입니다. 이 쿤달리니는 제한적인 반면, 아무도 인도에서 시디라고 불리는 특별한 힘들과 관련된 이 모든 것들을 다룰 필요가 없습니다. 쿤달리니의 비밀과 크리슈나 무르티의 성찰을 통한 이 여행을 저와 함께 나누어주신 것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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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만나요. [음악] [음악]
참고: 텍스트에서 “Krishna Morty”는 아마도 철학자 지두 크리슈나무르티(Jiddu Krishnamurti)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이며, “condalini/condundalini”는 “kundalini”의 오타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