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명되지 않는 도(道)는 도가 아니다. by 김영식

작성자
대흠
작성일
2024-02-10 11:33
조회
88

내가 학습했던, 영향력이 강한 '미신' 중에 하나는 노자 도덕경의 첫 문장인 도가도 비상도(道可道 非常道)이다. 나는 그 해석으로. "도가 말해질 수 있으면 진정한 도가 아니다"라고 배웠다. 그래서 진리는 신비한 것이어서 말로 설명할 수 없다고 이해하였다. 나중에 돌이켜 보면 절반만 맞는 그 '미신' 때문에 나는 많은 시간과 노력을 낭비했다. 

그리고 노자는 진리가 말로 설명될 수 없다고 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그렇게 이해하는 근거는 같은 장(도덕경 1장)에 나오는 無名天地之始(무명천지지시) 有名萬物之母 (유명만물지모)라는 구절이다. "이름 붙일 수 없는 것이 천지의 원천이며, 이름 붙일 수 있는 것이 만물의 모태다"라고 일반적으로 해석된다. "천지의 시작은 알 수 없지만, 만물은 이름 지어 나타난 것"이라고 의역해도 되겠다. 

진리는 '천지'에 대한 것이 아니라 '만물'에 대한 것이다. 진리는 실상에 관한 것일 수 없다. 그것은 영원한 미지이기 때문이다. 모든 수행은 만물을 이해하고 다루려는 것이고 그 결과인 도(道)는 말로 설명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설명되지 않는 도(道)는 도가 아니다. 

道可道 非常道(도가도 비상도) 名可名 非常名(명가명 비상명)에 대한 해석은 모호하다.  한자와 글의 맥락에 대한 지식이 없는 나는 그 구절에 대한 몇 가지의 해석들이 납득되지 않았다. 그러나 有名萬物之母 (유명만물지모 - 만물은 이름 지어 나타난 것)라는 구절에 포커스를 맞춘다면 도덕경 1장에서 주장하는 내용이 '도는 말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은 아니라고 판단된다. 

무아와 연기를 체득하는 수행 과정의 전반부까지는 말로 알려고 하지 않으며, 말로 간파하던 습관에서 벗어나는 훈련이다. 이 훈련은 언어의 바깥에 대한 간접적인(간접적일 수밖에 없는) 경험을 쌓는 과정에서 필요한 일시적인 방편이다. 그런데 이 방편에 달라붙어서 진리에 대해서는 개구즉착(開口卽錯 - 입을 여는 순간 어긋난다)이라는 미신에 사로잡히면, 체득을 하고서도 다시 어두워져 길을 잃어버리게 된다. 

도덕경 1장은 중묘지문(衆妙之門 - 모든 신비의 문)이라는 구절로 끝난다. 유명(有名)과 무명(無名)의 두 관계와 현상에 대하여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無名天地之始(무명천지지시 - 무명이 천지의 원천)를 체득하니, 그 미지 위에 드러난 有名萬物之母(유명만물지모 - 만물은 이름 지어 나타난 것)이 신비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제대로 바르게 有名 할 수 있어야 한다. 

無名을 無名이라고 하는 순간 이미 有名인지 모르고, 無名에 달라붙어 有名을 버리니, 설명되지 않는 도에 빠져 신비주의나 선민주의에 물드는 것이다. 有名을 버린다는 것은 설명을 등지는 것이다. 

진리는 체득(돈오) 하지 못한 사람들도 논리적으로 이해하고 수긍할만한 것이며 누구에게든지 반복 재현이 가능한 것이어야 한다. 無名을 체득(미지가 원천이라는 사실) 하지 못한 사람은 진리의 주장이 공감되지도 않는데, 그 설명하는 논리와 내용조차도 현상계의 다른 도그마들에 비해 옹색하니 진리가 세상에 도움이 안 되었던 것이다. 

無名天地之始(무명천지지시 - 무명이 천지의 원천)는 주관적인 체득의 영역이지만, 有名萬物之母(유명만물지모 - 만물은 이름 지어 나타난 것)이므로 진리는 과학이나 철학 등으로 검증될 수 있는 객관적 현상이다. 

그렇다고 자기가 체득한 진리를 학술적으로 논하거나 기술적으로 실험하여 증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 아니다. 자기의 말로 자기 자신에게 명료하게 설명할 수는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출처: https://www.facebook.com/bestprpr